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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와 산책

[산책-인제 용대리] 백골병단 전적비를 찾아서

by 피터와 나무늘보 2022. 6. 20.

 


백골병단은 ‘국군 최초 유격대’, 숭고한 뜻 기려야


 

미시령을 거쳐 용대리에 가까워지자 멀리 하늘에 애드벌룬이 떠있습니다. 국도를 빠져나와 용대리삼거리에 진입하니 걸게 현수막에는 ‘용대산물마켓’이라 쓰여 있고, 좌측에 있는 매바위 인공폭포의 시원한 물줄기가 반깁니다.

 

 

용대삼거리는 진부령과 미시령이 좌우로 갈라지는 곳으로 주차를 하고 오른쪽 산기슭을 보니 하얀 구조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산이라 할 수도 없는 작은 언덕에는 11m 높이의 ‘백골병단전적비’가 있는데, 우리나라 국군 최초의 유격대였던 백골병단 장병들의 넋을 기리는 전적비입니다.

 

 

6·25전쟁 당시 백골병단은 적 후방을 교란하고자 인민군 복장으로 침투해 첩보수집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고 합니다. ‘백골’은 전 대원이 백골이 될 정도의 각오를 담은 뜻이고, ‘병단’은 규모가 큰 부대처럼 과장하기 위해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게릴라를 의미하는 G군번과 병장 이상의 계급을 부여받은 육군본부 직할 결사 11연대 장병 363명은 1951년 1월 30일 오후 10시 영월군 영월읍에서 적진 후방으로 침투합니다. 그해 2월 7일에는 결사 12연대 330명이 강릉을 경유해 횡계 방면의 적진 배후로, 같은 달 14일에는 결사 13연대 124명이 묵호항에서 대관령과 월정사를 거쳐 각각 침투합니다.

 

 

서로 다른 지역으로 침투하던 3개 부대는 발각되거나 폭설을 만나자 1951년 2월 20일 당시 11연대장이었던 채명신 중령이 생존자 647명으로 백골병단을 창설, 통합 지휘하게 됩니다. 백골병단은 일주일 뒤인 27일 북한 69여단 소속 정치군관으로부터 작전배치 상황 등을 입수해 국군 수도사단에 전달하는 등 우리 국군의 작전에 큰 기여를 합니다.

 

 

1951년 3월 18일에는 설악산 인근인 인제군 필례마을에서 조선인민유격대 총사령관이자 인민군 중앙당 제5 지대장인 길원팔 중장과 참모장 등 고위 간부 13명을 전원 생포하는 쾌거를 이룹니다. 백골병단은 1951년 3월 19일 가리산리에 진출해 있던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남하하는 척하다가 다시 북상했으나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 사단급 규모의 북한군이 포위해오자 설악산 방면으로 철수합니다.

 

 

당시 11연대 2대대장이었던 윤창규 대위는 백담사 계곡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한 작전을 하다 다친 몸으로 24일 오전 3시 소청봉 부근까지 갔고, 적의 기습으로 부대가 혼란에 빠지자 “내가 대대장이다”라고 외치며 북한군을 유인합니다. 윤 대위는 생포하려고 달려드는 적병을 붙잡고 수류탄으로 자폭, 부대원들이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백골병단은 1951년 1월 30부터 3월 30일까지 영하 30℃까지 떨어지는 혹한 속에서도 북한군의 후방 320㎞를 종횡무진으로 활동하며 지휘통신 시설을 파괴하고 보급로를 차단하고, 북한군 연락병 등 309명을 생포하고 170명을 사살합니다.

 

 

그러나 혁혁한 전공에도 불구하고 2주 치 미숫가루만 들고 전투에 나섰던 647명 중 364명은 끝내 살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전몰장병 364명중 58위는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위패가 안치돼 있고, 3위는 대전현충원에 위패가 있으나 나머지 303위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백골병단 대원들에게 병적을 부여하고 보상금을 지급하기 위해 ‘6·25전쟁 중 적 후방지역 작전 수행 공로자에 대한 군 복무 인정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합니다.

 

 

백골병단이 전투를 벌였던 용대리는 휴전 이후에도 작전상 요충지입니다. 1996년 11월에는 백골병단전적비에서 2㎞ 정도 떨어진 용대리 창바우고개에서는 국군 장병 3명이 잠수함을 타고 강릉으로 침투했다가 북쪽으로 도주하던 무장공비들과 교전하는 과정에서 순직하기도 했습니다.

 

 

 

사족

채명신 중령과 인민군 길원팔 중장

채명신 중령은 당시 “중앙당에서 검열을 나왔다”고 속여 인민군 길원팔 중장을 생포합니다. 채 중령이 귀순을 권유하자 길원팔은 거부하고 두 가지를 부탁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권총으로 자결하게 해 달라는 것과 또 하나는 전쟁 중 부모를 잃은 10살 소년을 데려가 채 중령의 아들로 키워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채 중령이 실탄 한 발을 넣어 건네주고 방을 나오자 잠시 후 총성이 울렸고, 미혼이었던 채 중령은 이 고아를 아들이 아닌 친동생으로 양육합니다. 채 중령은 나중에 한국군 초대 주월 사령관을 지냈으며 ‘파월 사병 묘역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장군묘역이 아닌 병사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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