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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문화-속초시립박물관 발해역사관] 발해, 드라마 ‘대조영’으로 부활하다

by 피터와 나무늘보 2022. 6. 21.

 


발해역사관에서 만나는 한민족의 역사, 발해!

과거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


 

이렇게 무더운 날씨에 박물관을 찾는 스스로가 대견스럽습니다. 그러나 이미 속초시립박물관에는 가족단위 관람객들이 줄을 잇고 있어 놀라기도 합니다. 매표소에서 관람권(성인 1인 2천 원)을 사고 발해역사관으로 향합니다.

 

발해역사관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던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드라마 ‘대조영’은 재밌게 봤으면서 정작 역사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이죠. 이곳은 역사의 산교육장입니다.

 

무더운 날씨에도 가족단위 관람객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습니다. 오른쪽에는 작은 발해 연못이 있습니다.

 

 

발해역사관 지상 1층; 해동성국 발해실

 

발해역사관은 지상 1층과 지하 1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지상 1층에는 해동성국 발해실과 영상실로 구성되며, 229년 발해 역사 전반과 영역 그리고 유적지 사진과 영상·발해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영상실에서는 드라마 ‘대조영’ 의 중요 장면들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습니다.

 

해동성국 발해실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용머리돌이 눈에 들어옵니다. 발해 8~9세기 헤이룽장성 닝안시 상경성에 있던 것인데 지금은 일본 도쿄대가 소장하고 있으며, 이곳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라고 합니다. 일본... 

 

 

Zone.1 발해의 건국

발해의 건국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곳입니다.

 

발해사 연표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여유를 갖고 천천히 둘러봐야 할 곳입니다.

 

Zone.2 황상의 나라

대륙의 꿈 상경성입니다. 상경성 유적분포도도 볼 수 있습니다.

 

미니어처가 정교하게 되어 있어 발길을 멈추게 합니다. 

 

Zone.3 꿈꾸는 발해

상경성 유적지의 현재 모습과 미니어처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유지는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현에 있습니다. 그 위치는 현성 서남쪽 약 35km에 있으며, 동으로 동경성진(東京城鎭)과 약 3㎞ 떨어져 있습니다. 고성 범위 안에는 발해진과 토대자(土臺子), 백묘자(白廟子) 등 여섯 개의 촌락이 있습니다. 동경성진과 발해진은 모두 상경용천부 고성으로 인해 얻은 이름이며, 고성유지는 발해진의 영역 안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합니다.

 

당시의 유물을 통해 생활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Zone.4 드라마 ‘대조영’으로 부활하다

7세기 중반, 세계 최강국이던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합니다. 일찍이 수나라를 굴복시킨 당당했던 고구려였습니다. 그런데 풍전등화? 당태종 이세민이 직접 이끈 30만 대군은 안시성의 양만춘 장군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대제국 고구려의 위용이 휘날린지 불과 20여 년 후인 668년, 내부 분열로 인해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패망하고 맙니다.

 

수많은 고구려인들이 학살되고 통한의 망국인이 되어 유민으로 떠돕니다. 암울한 패망의 그늘 속 한 명의 고구려 청년이 분연히 일어납니다. 당나라의 지배에서 신음하던 고구려 유민을 구해내고 흩어진 군대를 규합, 처절한 투쟁을 통해 고구려 정통성을 잇는 새 나라를 건설합니다. 고구려 패망 불과 30여 년만의 일입니다.

 

대조영 그리고 발해... 오래 전 대륙의 역사에 대한 향수인가요? 아닙니다. 과거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일제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의 폐허 위에 나라를 세웠지만, 산적한 내부 문제에 허덕이고 계속되는 주변 강대국의 대립과 견제 그리고 지루한 분단 시대에 지친 우리들...

 

시간을 돌려 1300년 전의 발해를 봅니다. 패망의 황무지 위에 나라를 건설, 주변국 어디도 바라지 않는 건국, 권력투쟁으로 얼룩진 정치... 하지만 그 모든 문제를 극복해 낸 발해는 대립했던 당나라마저 인정한 동북아의 최강국이 되어 평화와 공존의 패러다임으로 세계와 교류하며, 고구려를 패망시킨 적국 신라마저 민족의식을 근간으로 우호친선관계로 껴안았습니다.

 

‘대조영과 발해’를 그린 일은 찬란한 한민족의 역사를 복원하는 일임과 동시에 우리에게 역사적 통찰력과 민족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작업이 되었습니다. 대제국 발해를 세운 힘은 여전히 우리 안에 있습니다.

 

발해체험실에서는 관람 기념으로 발해의 문양을 직접 찍어보는 곳이 있습니다. 사진은 실제로 문양을 찍는 모습입니다.

 

 

발해역사관 지하 1층; 발해고분 전시실

 

지하 1층에는 발해 3대 문왕의 넷째 딸 정효공주 고분을 주제로 고분벽화에 나타난 인물의 복식과 악기를 볼 수 있고, 똑같이 재현된 정효공주 고분도 관람할 수 있습니다.

 

Zone.1 고분으로 만나는 발해문화

고분(무덤)은 죽은 자를 위해 만든 시설이지만,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만들어진 문화유산입니다. 거기에는 당대인의 사후 세계에 대한 인식만이 아니라 당대의 문화 의식, 전통 의식이 매우 풍부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특히 축조 당시의 토목 기술 수준과 부장된 유물은 당대의 물질문화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전통성으로 말미암아 사용 주체의 성격까지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발해무덤은 발해의 수도가 있었던 중국 지린성(吉林省)의 여러 도시와 변방지대였던 함경도 및 러시아 연해주 지방에 이르기까지 수천 기가 분포하고 있습니다. 발해무덤의 구조, 매장풍습, 벽화, 출토 유물을 통해서 보면 발해문화는 고구려 문화를 위주로 말갈문화, 당 문화를 흡수하여 형성된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발해 문화에 반영되는 이런 다원적이고 복합적인 요소는 결국 발해국은 고구려 유민이나 말갈족이 단독으로 세운 국가가 아니라 고구려 유민과 고구려의 통치를 받았던 말갈의 일부가 공동으로 건립한 국가이며, 발해 건국 이후 영토의 확장과 더불어 기타 민족도 통합하여 다민족 국가를 형성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Zone.2 비문으로 밝혀지는 신비

서기 737년 무왕이 죽자 그의 아들인 대흠무(大欽茂)가 왕으로 즉위합니다. 이가 바로 발해의 제3대 문왕(文王:738~794)입니다. 문왕은 발해 전체 역사에서 거의 1/4에 해당하는 57년 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문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발해는 본격적으로 부흥기를 맞이합니다. 고왕(高王:大祚榮)과 무왕(武王:大武藝)은 정복활동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여 국토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문왕은 이에 힘입어 나라 안 체제를 정비하는데 온 힘을 기울입니다. 그의 개혁 정책의 핵심은 문치(文治)에 있었으며,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 당나라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유학과 불교를 진작시켰습니다. 이러한 개혁정치는 상경(上京)으로 천도한 후기에 더욱 가속화되었으며, 대외 관계에서도 선린우호 정책을 유지합니다.

 

문왕 대흠무는 만주 동쪽 지역을 개발하는데 힘을 쏟았고, 755년 도읍을 첫 도읍지인 둔화 시 동모산에서 동북쪽 300리 지점에 있는 상경으로 옮겨 발전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785년 다시 동경으로 천도합니다. 고왕, 무왕 시기에 확장된 영토를 5경 15부로 62주로 재편하고, 중앙에는 선조성(宣詔省), 중대성(中臺省), 정당성(正堂省)을 포함한 3성 6부를 설치하였으며, 군사적으로는 10위제를 마련함으로써 국가 통치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762년 당나라는 발해 문왕을 ‘발해 군왕’에서 ‘발해 국왕’으로 높여 불러 나라 안팎으로 높아진 지위를 인정하였습니다. 이는 발해가 이 시기를 전후하여 국가 통치의 기틀이 완비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길림성 화룡시 용두산에서 발견된 정효공주 묘지에 의하면, 문왕을 대왕(大王), 성인(聖人), 황상(皇上)으로 부르고 있어 고구려를 계승하여 건국 이후 반영되었던 황제국(皇帝國), 천자국(天子國)으로서의 면모를 확실하게 갖추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짐승얼굴의 기와입니다. 매우 독특한 모양으로 당시의 기와문화에 대한 예술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Zone.3 되살아나는 발해인

7세기 후반에 성립된 발해의 문화는 여러 가지 요소가 혼합된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건국 초기에 고구려 문화를 이어받았고, 8세기 중반 3대 문왕 대문예가 당나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이질적인 당 문화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또 발해의 영토 일부에서 오랫동안 거주해왔던 말갈인의 문화 흡수 및 신라나 일본과도 문화적 교류 관계를 유지하면서 나타나게 된 특징으로, 발해인은 각국의 다양한 문화들을 적절히 융합시켜 발해 고유의 독자 문화를 탄생시켰습니다.

 

Zone.4 정효공주 고분

정효공주 무덤의 벽화

정효공주 무덤의 벽화는 묘실(墓室:널방)의 동서북 세 벽과 연도(羨道:널길) 안에 모두 12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습니다. 인물들은 그 직분에 따라 무사, 시위, 악사, 시종, 내시 등의 부류로 구분됩니다. 연도 뒤편에는 무사 2명이 그려져 있는데, 무사들은 붉은 술을 단 투구를 쓰고 고기비늘 무늬 갑옷을 걸치고 왼쪽 허리에 검을 차고, 오른손으로 철퇴를 잡아 어깨에 메고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묘실 동쪽 벽에는 4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는데, 공주를 경호하는 시위 1명과 시중을 드는 내시 3명입니다. 그들은 머리에 붉은색 머리띠를 두르거나 두 날개를 교차시킨 복두(보자기 복頭)를 썼으며, 손에는 철퇴, 구리거울, 봇짐 등을 들고 있습니다. 묘실 서쪽 벽에도 4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는데, 1명은 호위병이고 나머지 3명은 악사들입니다. 묘실 북쪽 벽에는 활을 메고 화개(華蓋)로 보이는 양산을 들고 있는 시종 2명이 묘사되었습니다. 벽화에 그려진 인물들의 키는 113~117cm 정도입니다.

 

정효공주 무덤의 벽화는 벽돌 위에 회칠을 하고 그렸다는 점과 시위도(侍衛圖:무덤 주인을 지키고 호위하며 시중을 드는 인물을 묘사한 그림)를 중심 제재로 하였다는 점에서 중국 당나라 고분벽화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무덤의 구조나 사신도, 병풍, 시녀 등이 등장하지 않은 점에서 중국의 벽화들과 많은 차이가 납니다. 이 시기 발해인들은 고구려 벽화의 기법을 일부 계승하여 그 형식을 독자적으로 소화해 사실적 기법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들은 발해인의 외모와 생활상을 잘 보여 줍니다.

 

Zone.5 한 민족의 역사, 발해!

발해는 818년 10대 선왕(宣王:大仁秀, 819~830년)이 즉위하면서 영토를 크게 개척하여 중흥을 이룩하였습니다. 이때 발해는 대부분 말갈 부족을 통합하여 연해주 지역까지 진출합니다. 그리고 당나라의 영향력이 약해진 요동 지역에 다시 진출하여 요양 일대까지 차지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라 방면인 대동강 이북지역까지 나아갑니다.

 

11대 대이진(大彛震:831~857)으로부터 12대 대건황(大虔晃:858~871), 13대 대현석(大玄錫:872~894) 대에 융성기를 맞이합니다. 이 무렵 발해는 나라 안의 사방 경계와 5경 15부 62주의 행정구역을 완성하고, 통치조직을 다시 정비하여 최대 전성기를 누립니다. 당나라는 이 시기의 발해를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으로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일컬어 그 세력의 성대함을 인정했습니다.

 

7세기 이후 격동하던 동북아시아는 9세기에 이르러 당나라를 중심으로 신라 발해 일본 등이 공존하는 안정된 국제관계의 틀을 갖춥니다. 각 나라 사이에 사신 왕래가 잦아지고 일반 사람의 교류 또한 늘어납니다. 그런 가운데 발해는 농업, 수공업, 수렵, 어로 등 모든 경제생활 면에서 생산이 늘어 국내 상업과 대외 무역이 크게 증가합니다.

 

발해는 특히 당나라와 가장 활발히 교류하였습니다. 발해에서 건너간 학생들은 당나라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에 입학하여 빈공과(賓貢科) 시험에서 많은 합격자를 배출합니다. 발해 사람들은 당시 가장 앞선 문화를 누리던 당나라에 유학하여 선진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입니다. 이를 통해 발해는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 참고; 속초시립박물관 자료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태백산맥의 시원한 바람이 맞이합니다. 깃발도 반갑다는 듯 펄럭입니다. 찬란한 한민족의 역사를 살펴보고 역사적 통찰력과 민족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도 볼 수 있었습니다. 대제국 발해를 세운 힘은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깃발 사이로 속초시립박물관 전망대가 보입니다. 이제 발길을 옮길 때입니다. 

 

발해역사관을 나오자 무더위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햇살이 따갑지만 발걸음은 힘차고 가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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